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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유리. 죽여… 도깨비.

2025년 4월, 5월에 걸쳐 맨해튼 소극장 ‘The Public’에서 공연된 연극의 제목이 희한하다. “Glass. Kill. What If If Only. Imp.” 우리말로 “유리. 죽여. 만약 만약이라면 어쩌지. 도깨비.”라 옮기기로 한다. 영국 극작가, 올 86세 ‘Caryl Churchill’의 걸작품.   첫 번째 무대, ‘Glass’에서는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여성의 취약성을, 두 번째, ‘Kill’에서는 곧잘 전쟁을 일으키는 인류의 뿌리 깊은 가학성을 묘파한다.   세 번째, ‘What If If Only’. 아홉 살짜리 내 손녀딸 세실리아(Cecelia)가 등장한다. 심한 상실감에 빠진 사내에게 그녀는 말한다. “I am going to happen!” “나는 발생할 것이에요,”라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린다. “나는 피어날 거예요.”는 어떨까. “나는 일어설 거예요?”   마지막 무대, ‘Imp’에서 마약중독자, 지체부자유자 등등 사람들의 대화는 끊임없이 계속되지만, 소통의 흔쾌한 연속성은 여전히 부재한다. 도깨비가 무서워서 병 속에 넣어 코르크로 입구를 막아 두는 정황. 이들의 대화에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버금가는 단절감이 범람한다. 이 연극은 만화경 같은 구성으로 짜여졌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실체는 없고 그림자만 있는, 말이 사라지고 느낌만 살아나는 예술적 분위기.   당신과 내 대화에서 서로 딴소리를 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나마 의사가 대충 전달되는 게 재미있지. 사실주의 그림보다 추상화에 마음이 쏠리는 이치와 비슷하다. 문맥이 엉망이라도 바닥을 치는 진실 같은 것이 확 느껴지는 순간에.   옛날에 문라이팅을 할 때 병동에서 두 노인환자가 양지바른 창문을 향해 앉아 대화하는 정경을 접한 적이 있다. 한쪽이 말한다. 자기 아들이 음주운전에 자꾸 걸려 감옥에 갈 것 같다고. 다른 쪽이 말한다. 자기 딸의 두 번째 임신이 또 아들이라는 소식을 듣고 아주 기쁘다고.   이들은 짐짓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계속한다. 공감이나 적개심이 전혀 없이 다정하고 평화로운 의사소통을 이어가는 것이다.   허언(虛言). 빌 虛, 말씀 言. 빈말은 허망하다. 망상에서 나온 말을 망언(妄言)이라 하지. 망령될 忘, 말씀 言. 망상은 내 소관이다. 허언과 망언을 분별하기가 어려워서 고심하는 것 또한 직업의식이다.   사전은 허언을 ‘실속이 없는 빈말’ 외에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대어 말을 함’이라 풀이하고, 유의어로 ‘거짓말, 공염불’을 든다. 우리는 거짓말을 거짓말이라 하는 대신 ‘허언’이라는 한자어로 포장한다. 거짓말쟁이를 허언증 환자라 지칭하며.   기원전 1세기. 줄리어스 시저의 양자(養子)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정적(政敵)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알콜중독, 바람둥이, 클레오파트라의 꼭두각시라는 가짜뉴스를 퍼뜨린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우누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자살한다. 이것이 위키피디아가 지적한 인류 최초의 ‘fake news, 가짜뉴스’다. 고의적으로 한 새빨간 거짓말!   세 번째 무대, ‘만약 만약이라면 어쩌지’에 나오는 이런 대사가 뼈를 때린다. “I‘m the ghost of a dead future. I’m the ghost of a future that never happened…”, “나는 죽은 미래의 유령이에요. 한 번도 생겨나지 못한 미래의 유령이요….” 다시 말해서, 당신과 나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미래의 유령인지도 모른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도깨비 유리 허언과 망언 허언증 환자 거짓말 공염불

202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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